본문 바로가기

National Gallery/1600-1700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루벤스(Peter Paul Rubens)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609-10년

나무에 유화, 185*205cm


미술사에서 16세기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른다면, 17세기는 바로크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로 "일그러진 진주(barroco)"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정적이고 조화를 중시하는 르네상스 시대에 비해 과장된 표현을 하는 17세기 미술에 대한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였지만 지금은 전문적인 용어로 격상되어 17세기를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런 극적이고 생동감이 강조되는 그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신도들이 개신교로 이탈하는 것을 막아보려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요구였다. 그림을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이해하게 하는 과거의 역할에서 나아가 보다 강력한 이야기로 강렬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림을 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 그림은 역동적이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해 빛과 그림자를 잘 활용한 것을 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루벤스는 "화가들의 군주, 군주들의 화가"라고 칭해졌던 사람이다. "화가들의 군주"라는 것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인데 과거 선배 화가들의 장점을 잘 흡수하여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화가라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군주들의 화가"라는 말은 당시 유럽의 군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인데 스페인의 펠리페 4세는 루벤스를 외교관으로 영국에 파견하기도 할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미술 애호가 찰스 1세는 루벤스를 극진히 대접하여 루벤스가 영국에 1년 머무는 동안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게 하였고 그리하여 현재 내셔널 갤러리는 루벤스의 작품을 30점 넘게 소장하고 있으며 29번 방은 루벤스의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을 정도이다.

이 그림은 구약 성경 판관기(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손은 유태인으로 무척 힘이 센 사람이었는데 머리카락을 자르면 힘이 빠져나간다는 비밀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삼손은 블레셋(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여자인 데릴라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데릴라에게 은화를 주면서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낼 것을 요구했다. 돈에 욕심이 생긴 데릴라는 삼손에게 힘의 비밀에 대해 물었고 여러 번 거짓 대답을 하던 삼손은 결국 힘의 비밀을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림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후 삼손이 잠들자 데릴라가 블레셋인들을 불러 들여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바로크 그림의 특징인 극적이고 장대한 구성, 그리고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빛을 받은 데릴라의 상반신은 하얗게 빛나지만 삼손의 허리 아래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빛의 능숙한 사용과 삼손의 근육질 몸매 그리고 데릴라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이 작품의 극적 효과를 더욱 커지게 한다. 삼손은 우람한 몸매를 드러낸 채 데릴라의 무릎에 기대어 잠들어 있고 이런 삼손을 안은 데릴라의 옷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데릴라의 하얀 피부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곧 삼손의 두 눈에서 쏟아질 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단순히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 힘을 빼앗은 것에 그치지 않고 눈을 멀게 한 다음에 노예로 부려먹었는데 이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 로빈스 코린트의 <눈 먼 삼손>에 잘 드러나 있다. 오른편 문간에서는 그의 눈에 박을 커다란 나무 송곳을 든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고 이 장면을 그리기 위해 루벤스는 이발사가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꽤 오랜시간 관찰했다고 전해진다.

이 그림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시의원이자 루벤스의 친구였던 로콕스의 저택 벽난로 위에 걸도록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다. 여러 해 전 이 그림을 특별전에서 원래 높이(2미터 이상)로 걸었을 때 루벤스가 관람객의 시선을 고려해 그림의 각도를 얼마나 훌륭하게 계산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벽난로 위에서 붉게 타오르는 데릴라의 옷이 얼마나 강렬한 느낌을 주었을지 상상이 된다.

여자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수난을 겪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당시 플랑드르 미술에서는 흔한 소재였고 루벤스는 이 전통을 성서에 등장하지 않는 노파를 등장시킴으로써 새롭게 수용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데릴라의 모습과 노파의 모습이 쌍둥이처럼 닮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데릴라의 미래 모습이 노파이며, 노파의 과거 모습이 데릴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는 미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알프스 이북으로 옮겨갔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루벤스도 이탈리아에서 8년간 유학을 했는데 그런 영향이 그림에서도 잘 보여지고 있다. 그림 속 이발사 머리 뒤 벽감에 놓여있는 동상은 비너스와 큐피드인데 성서를 내용으로 하는 그림과 어울리지 않지만 삼손의 이런 수난의 원인이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고 또한 삼손의 우람한 근육질 몸매에서도 미켈란젤로와 이탈리아의 영향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림을 오래 보고 있노라면 데릴라의 복잡한 표정에 계속 눈이 머물곤 했다. 데릴라는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그 표정은 자랑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데릴라의 표정에는 도취감과 승리감, 동정과 연민 등이 복합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감정이 표현되어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National Gallery > 1600-17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  (0) 2017.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