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Peter Paul Rubens)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 1632-35년
참나무에 유화, 144.8*193.7cm
<파리스의 심판>은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된 중요한 사건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신이 초대받았는데 초대받지 못한 신은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초대받지 못한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화가 난 에리스는 결혼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에 황금사과 하나를 던져 넣었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기에 여신들 간에 서로 자기가 황금사과의 주인이라는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고 결국 세 명의 여신으로 그 대상이 좁혀지게 되었는데 바로 제우스의 아내이자 결혼과 가정의 여신인 헤라,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그리고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였다. 세 명의 여신은 제우스에게 가서 결론을 내려달라 요청했지만 제우스는 그 힘든 결정을 인간에게 위임했는데 그 때 선택된 인간이 바로 파리스였다.
이 그림은 지금 파리스가 황금사과를 손에 들고 누구에게 줄 지 고민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파리스 주변에 보이는 개와 양들은 그가 양치기였음을 보여주는데 파리스는 트로이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났기에 어릴 때 산 속에 버려져서 양치기로 키워졌다. 파리스 뒤에 날개달린 모자를 쓰고 뱀모양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은 신들의 왕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인데 지금 제우스의 명령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여신 세 명도 모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상징물과 함께 그려졌는데 제일 오른쪽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신은 공작새를 대동하고 있는 헤라이며, 제일 왼쪽 앞모습을 보이는 여신은 부엉이와 메두사의 방패를 통해 아테나임을, 가운데 여신의 뒤쪽에는 날개 달린 꼬마인 큐피드를 그려넣어서 비너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세 여신들은 본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도록 파리스에게 뇌물을 제공하게 되는데 헤라는 "권력"을, 아테나는 "지혜"를 그리고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을 약속했고 그 중 비너스의 제안이 마음에 든 파리스는 황금사과를 비너스에게 건네주려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비너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아테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다.
문제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부인이 되어 있었던 헬레나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비너스의 도움으로 파리스는 헬레나와 함께 스파르타 궁전을 탈출하여 트로이로 도망할 수 있었고, 이에 헬레나를 구출하기 위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침략하게 되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림 위쪽 가운데 하늘을 보면 이 사과를 건넴으로 인해 일어날 불행한 결과를 예감한 복수의 여신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이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인 동시에 신들의 전쟁도 되었기 때문에 10년이 되도록 끝이 나지 않았다. 파리스에게 앙심을 품은 헤라와 아테나 그리고 포세이돈 등은 그리스 편을 들었지만, 비너스와 아폴로 그리고 아레스 등은 트로이를 응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국 트로이의 목마로 인해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전쟁은 끝나게 되는데 전쟁 중에 파리스는 전사하고 헬레나는 원래 남편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어릴 때 읽으면서 어이없었던 기억이 난다. 신들의 장난으로 인해 죽어야 했던 헥토르, 아킬레우스와 같은 무수한 그리스의 영웅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파리스의 심판>은 루벤스에 의해서 여러 번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에 의해서도 매우 자주 그려졌는데 당시 여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금기였지만 예외적으로 여신의 누드는 허용이 되었고 <파리스의 심판>은 여신이 무려 세 명이나 등장하는 훌륭한 소재라는 이유가 컸다.
이 작품에서 루벤스가 여신의 앞, 옆, 뒷모습을 누드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모델은 루벤스의 두번째 부인인 헬레나였다. 루벤스는 첫번째 부인 이사벨라와 49살에 사별한 후 53살에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재혼 상대는 당시 16살이었던 헬레나 푸르망이었다. 루벤스는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던 사람이었기에 귀족의 딸과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화가로 활동하면서 접한 많은 왕족, 귀족들의 도덕적 위선에 질렸던 루벤스는 지위와 상관없이 대화가 통하는 헬레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루벤스는 두 명의 부인과 모두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 특히 두 번째 부인 헬레나에 대한 애정은 그 녀를 모델로 한 각종 그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헬레나와 10년의 여생을 함께 하면서 자식도 다섯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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