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ational Gallery/1500-1600

바커스와 아리아드네(Bacchus and Ariadne)


티치아노(Titian)

바커스와 아리아드네(Bacchus and Ariadne), 1520-23년

캔버스에 유화, 176.5*191cm


<바커스와 아리아드네>는 페라라 공국의 알폰소 데스테 1세의 궁전을 꾸미기 위해 그려진 세 편의 연작 중 하나(나머지 두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있음)인데 원래 라파엘로에게 의뢰되었으나 라파엘로가 요절하는 바람에 티치아노가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내용은 유명한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인데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테네의 왕자였던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매년 크레타 섬 미궁 속에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왕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제물을 자처해 크레타 섬에 가게 된다. 크레타의 궁전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다른 소년, 소녀들과 달리 당당하게 왕과 맞서 이야기하는 테세우스의 모습에 반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그를 살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미노타우로스가 살고 있는 미궁을 설계한 다이달로스를 찾아가서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방법을 물어보게 되고 다이달로스는 미궁의 입구에 실을 묶어 놓고 실을 풀어가며 들어갔다가 그 실을 다시 되감으며 나오라고 알려주게 되고 그 사실을 아리아드네는 다시 테세우스에게 알려준다.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온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함께 아테네로 향하다가 낙소스섬에 이르러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낙소스 섬에 버려두고 떠나게 된다. 이 그림은 테세우스가 떠나간 사실을 알고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리아드네의 모습과 그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전차에서 뛰어내리는 바커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 이탈리아에는 두 가지의 화파가 있었다. 선과 형태를 중요시하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과 빛과 색채를 중요시하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가들. 전자는 색이라는 것은 형태를 잘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지만, 후자는 형태 못지않게 색채를 중요시함으로써 색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는데 그런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티치아노이다. 그래서 유럽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형태는 미켈란젤로에게, 색채는 티치아노에게 배우라"는 금언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화가로 활동한 기간만 65년에 달하는 티치아노는 생전에 화가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린 화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작업하다 붓을 떨어뜨리자 카를 5세가 몸을 굽혀 붓을 주워서 건네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남아 있을 정도이다.

이 그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대각선을 그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왼쪽 삼각형의 주된 색조는 푸른색이고, 오른쪽 삼각형의 주된 색조는 갈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깨끗하고 순수한 아리아드네의 세계와 혼란스럽고 칙칙한 바커스의 세계를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막 사랑에 빠진 바커스는 갈색에서 푸른색으로 옮겨오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다.

멀어져가는 테세우스의 배를 바라보며 슬퍼하던 아리아드네는 떠들썩한 바커스 무리의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데 전차에서 뛰어내리면서 바커스는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왕관을 벗기면서 나의 영원한 사랑을 보여 주겠다며 하늘 높이 던졌더니 이게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별자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게 오늘날 "왕관자리"의 유래이다. 바커스를 따르는 여러 무리 중에 몸에 뱀을 감고 있는 인물도 보이는데 이는 1506년에 발견된 "라오콘 군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넣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주의해서 볼 점은 아리아드네의 발치에 놓여 있는 황금색 단지이다. 그 안에서 티치아노의 서명을 볼 수 있는데 화가가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본인의 작품 안에 서명을 남긴 최초의 화가도 티치아노라고 한다.

베네치아는 오랫동안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유럽으로 새로운 산물들이 들어오는 집산지의 역할을 했기에 가장 좋은 물감을 가장 빨리 수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이 색채를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5백년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색상과 바커스의 휘날리는 붉은색 튜닉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티치아노의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